내가 개봉하지 않은 상영기
은근히 낯을 가리긴 해도 프로젝트는 안 해요
문·그림 김지환 조경작업장 라디오 대표 김지환은 영남대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시트포스와 스튜디오엘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작업장 라디오 대표이다.
스스로를 작업반장, 설계공이라 칭하도록 설계와 시공의 중재자(신호 등)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관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사회적 대기업을 만들어 도시 내 모든 디자인에 손을 대려는 야망과 유명 건축가와 조경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절망과 환호를 즐기는 이상주의적 성향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때로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을 해시태그로 덧붙이기도 한다.
#라디오에이스 #정원작가 #은근히낯가림 #조경뚱
수신인 불명의 전파 라디오웨이브 연재를 통해 미개봉작을 개봉하게 되어 기쁜 한편, 철자(학) 없음 맥락 없음 판단 미스 아마추어리즘 등, 너무 대단한 것이 「없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크다.
경험, 학력, 스펙이 얕고 작은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소개할 프로젝트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트, 에이스, 주류 집단에 속하지 않거나 공모 수상, 비범한 능력, 트렌디한 감각을 즉각 갖추지 않고도 지속적인 조경 활동을 할 수 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조경 덕후는 스스로를 ‘조경 덕후’라고 소개한다 조경 관련 인물, 새로 만든 공간, 도시녹지 관련 정책과 법규, 도면과 내역, 공모 결과 등 거의 모든 것을 관심 있게 탐방하고, 사 모으고, 읽고, 보존하고 대화를 나눈다.
덕후로서 주력하는 것 중 하나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있어서의 조경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다.
작은 프로젝트에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발전 가능성이 낮은 것에도 진심으로 임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거나 정식 참여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조경의 가치를 프로젝트 관계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고 회사 운영이 위험해지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나의 미개봉작은 대개 덕후의 선택과 기계적 집중의 결과이며 조경 관련 작업, 활동, 행위를 사랑함으로써 생겨난 부산물이다.
대부분이 미완의 작업이거나 망상적 희망의 결과물이다.
조경가이며 일반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포함시켜야 할 시대상이 주목받지 않는 프로젝트에 투영한다.
재밌다 응원과 인정도 받는다 공식적인 역할을 인정받을 가능성은 낮지만 라디오 또는 김지환의 정체성이 반영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큰 프로젝트일수록 사공이 많다.
아무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 수 있는 이름 없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공모, 제안 이외 무상으로 할 일은 없다.
민주주의 정원, 한국성 표현의 일환으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민주주의정원 ‘민주주의정원’은 2016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출품작으로 2015 코리아가든쇼 출품작 ‘소 잃은 외양간’, 2016 서울정원박람회 출품작 ‘아낌없이 쓰는 사람’과 함께 사회문제 3연작을 이룬다.
소를 잃은 외양간은 세월호와 관련해 사회적 대참사를 언급했고, 아낌없이 쓰는 사람은 평창올림픽을 위해 500년 된 원시림을 훼손한 사건을 주제로 개발과 보존을 얘기했다.
민주주의 정원에는 15년 사회 분위기가 담겨 있다.
당시 중앙정부는 정권을 잡기 위해 지방정부를 탄압하고 헌법에 보장된 지방자치제를 축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정원이 되는 모든 개념을 헌법에서 가져왔다.
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모티브로 마당 입구에 대나무 숲을 만들어 숲 속의 외침을 밖으로 퍼뜨리는 붉은 깔때기를 더했다.
조선시대를 연상시키는 공간연출 기법, 식물 배치, 의미 부여 같은 답 없는 한국성 찾기의 일환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 한국성을 표현하려는 실험으로 단순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찾으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디자인이다.
가든쇼의 공식처럼 여겨지는 혼합재료, 비우기와 울타리, 한국성을 비롯한 조선시대 풍에 반발하는 33세 김지환의 분열적 정신세계의 반영이다.
제부도의 민무늬 광장 프랑스 파리 전경 사진에서 에펠탑을 지우면 어떻게 될까. 그곳이 파리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알아도 에펠탑이 없는 파리는 매력이 떨어진다.
제부도의 랜드마크인 응바위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스튜디오 근무 당시 맡았다.
현장을 다녀오면서 우뚝 솟은 응암을 강조하는 공간을 구상했다.
다른 구조물이 없는 평평한 민무늬 광장을 설계하고 다양한 이미지 작업과 텍스트로 논리를 폈다.
다행히 발주처가 실험적인 방향과 디자인을 수용해 위탁보고서 작업도 마쳤다.
이후 조명 같은 기반시설, 상징적 조형물 등이 들어서면서 메바위의 극적인 위상은 상쇄됐지만 조연으로서의 민무늬 광장의 개념은 지켜진 듯 뿌듯하다.
조경 프로젝트지만 조경 공간이 주연이 아닌 경우도 많다.
대상지에만 집중하면 모든 분석과 디자인이 대상지 중심이 된다.
하지만 프로젝트 목표 달성을 위해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도 경관 전문가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강력한 컨셉, 꼿꼿한 디자인보다 때로는 유연한 태도로 조경의 가치를 끌어올리려 한다.
제부도의 민무늬 광장 컨셉트 이미지. 우뚝 솟은 응암의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구조물이 없는 평평한 민무늬 광장을 구상하였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역광장 도시재생사업, 뉴딜사업, 마을개선사업 등 다양한 공간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밀양역 주변 공간 제안에 동참했다.
발주회사는 조경을 적당히 처리(?)하고 실시설계가 가능한 사무실을 찾고 있었다.
시설물 디자인업체 발주업체가 마련한 계획안은 광장을 다양한 조형시설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현장 답사 후 기존 계획안으로는 사업 목표에 미달한다고 판단해 공간 자체를 개선하는 방향을 제안했다.
하지만 원하는 방향과 달랐는지 다시 연락은 주지 않았다.
좋고 싫음은 기본적인 피드백도 없이 끝나버린 덕후적 선택 중 가장 아쉬움이 남는 프로젝트다.
- 환경과 조경 402호(2021년 10월호) 수록본 중 일부